나에게./내게온 글.

"사랑을 믿다" 중에서 ...... 권여선.

북아프리카 2022. 12. 19. 10:10

 

 

권여선....." 사랑을 믿다 " 중에서.....

"일 년 전 그녀는 어떻게 숨 쉬었던가. 그녀에게도 살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던가. 물론 있었을 것이다. 결코 희망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아 그녀가 그것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말이야.”

그녀의 말에 친구가 처연히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면 여전히 뭔가 남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대관절 뭐가 남아 있다는 거야?”

“글쎄,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별로 보잘것없는 것들이긴 하지.”

“그러니 무슨 상관이야?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 남아 있다고 해도 난 상관없어.”

친구가 한 손으로 과장되게 허공을 그렸다.

“아니! 보잘것없어! 정말 보잘것없는 것들만 남아 있지!”

친구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그녀가 구원의 메시지를 주리라는 기대와 어떤 것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리라는 체념이 안주 반반처럼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보잘것없는 것들이 상황을 바꿔놓거든. 거의 뒤집어놓는다고도 할 수 있어.”

친구가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상황이 뒤집힐 수 있다는 거야?”

친구는 그녀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 상황이 뒤집힐 수 있다는 의미를 어떻게든 애인이 다시 돌아오게 만들 비법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선 곤란했다. 그녀는 냉정하게 말할 필요를 느꼈다.

“이를테면 친척 집에 심부름을 간다든가, 업무 파트너의 경조사를 챙긴다든가 하는 것들. 그런 일들을 받아들여.”

순식간에 친구의 눈빛에 배신감이 차올랐다. 친척 집? 경조사? 친구는 그녀가 자기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심지어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힘없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차라리 할 말이 없으면 가만히 앉아 있어 주든지.”

.

.

.

그래,

그랬다.

지나고 보니 커다란 상실과 커다란 슬픔 뒤에 남아 나를 위로하고 다시 서게 했던 건 대단한 위로나 커다란 변화나 모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오래전,

스무 살에 아버지의 죽음에 대책 없이 당해버리고 나를 , 우리 가족을, 다시 살게 했던 건 함께 밥을 먹는 일 , 함께 우는 일 그리고 각자 학교를 다니고 집안일을 하고 다시 친구를 만나고 함께 잠을 청하고 함께 티브를 보고 그러다 조금 웃게도 되고, 그 웃음이 죄를 짓는 거 같아 움찔 거리다가 그 웃음이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고 그러다 다시 오래 웃을 수 있게 되기 까지.... 나를, 우리를 버티게 했던 건 그저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기였다.

이혼 후 ,

아이 둘을 데리고 커다란 폭풍 속을 견디고 있을 때도 그랬다.

밤에 눈을 감으면서 내일 아침에 다시 눈뜨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잠들어도 어김없이 아침에 눈을 뜨고 아이들을 깨워 학교를 보내고 어기적 거리며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하며 장을 봐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불면으로 약을 털어 넣으며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하고....

그때도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기였다.

지나고 보니,

커다란 상실을 커다란 슬픔을 메울 수 있었던 것들은 대단한 위로나 대단한 변화 혹은 다짐이나 각오 그런 대단한 것들이 아닌 아주 자잘한 생활(生活) 들이었다. 아주 자잘한 모래와 조약돌들이 틈새 없이 메워져 다시 단단히 만들어 주는 거 같이....

아침에 알람으로 깨어나 눈 비비며 커피를 내리고 아침 준비를 해서 먹고 출근 준비를 하고.....

긴 출근길을 드라이브하면서 이루마의 피아노를 듣는다. 간혹 차창 밖 풍경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기도 하고 시그널에 멈추어 앞에 정차한 차의 번호판을 본다. "워싱턴 주에서 왔네 참 멀리 달려왔구나 " 먼 길을 달려온 트럭의 고단함을 잠시 생각한다. 일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때로는 웃고 짜증 나고 시간 나면 깜빡 졸기. 퇴근을 하며 가끔 장을 보러 가서 기웃거리기.... 따뜻한 저녁을 먹고 따뜻한 샤워를 하고 친구가 선물한 향이 좋은 보디로션을 바르며 즐거워 하기. 아이들과 잠깐 수다를 떨기도 하고 가끔은 새벽까지 졸면서 지나간 영화 보기....

 

이렇게 물이 흐르듯 살아가는 거 ,,,,

자잘한 모래와 자갈들이 커다란 돌멩이 틈새 틈새로 촘촘히 채워지듯 그렇게 나도 모르게 단단하게 채워져 가는 거....

"삶"은,

가벼운 듯 하지만 ,

참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