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내안에 수다.

미트로프를 구우며...

북아프리카 2022. 12. 22. 07:55

 

 

 

일주일 전 같이 사는 딸내미가 코로나 확진이 되었다.

토요일에 같이 주방에서 딸내미 생일 축하 음식을 같이 만들며, 먹으며 그랬는데 일요일 새벽에 내 방문을 노크하며 "엄마 나 코비드 양성이야~"라고 말했다. OMG ~~~~`@,@

일요일 아침에 나도 테스트를 해보니 나는 다행히 음성이었다. 따로 또 같이의 동거를 일주일 했다.

 

딸은 처음엔 목이 아프고 하룻밤 새 오한이 들어서 추웠고 머리가 기분 나쁘게 좀 아프고 온몸이 몸살처럼 살살 아프고 그렇게 24 시간 정도 아프더니 괜찮아졌다. 딸과 나는 부스터 샷까지 접종을 마쳤다. 일주일 내내 아침마다 나는 계속 테스트를 했고 계속 음성 판정을 받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전염력이 없어진 딸내미가 내게 주문한 저녁 메뉴는 미트로프....

다진 소고기를 볼에 넣고 미트로프 시즈닝을 뿌리고 케첩을 뿌리고 빵가루를 넣고 달걀을 넣고 다진 야채를 좀 넣고 주물럭주물럭..... 미트로프 팬에 고기를 넣고 375 도에서 1 시간 15 분 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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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로프를 구울 때면 늘 데이브가 생각난다.

그는 예전 살던 집에 내 이웃이었다. 그는 은퇴를 앞둔 소방대원이었다. 그날도 그는 늦게까지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는 불빛이 없었다. 그는 부인인 조이스가 벌써 잠이 들었겠거니 생각했다. 거실을 지날 때 그는 바닥에 희미한 형체를 보고 불을 켰다. 조이스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다.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였다.

 

조이스는 우울증 환자였다.

늘 집안에서 홀로 지냈다. 가끔 우리 아이들과 동네 아이들에 집 문을 두드리면 집안으로 초대해 아이스크림을 주곤 했다. 아이들을 찾으러 몇 번 그 집 문을 두드릴 때 그녀와 잠깐 인사를 나누곤 했다. 아담한 키에 아주 흰 피부 어깨까지 내려오던 단발의 갈색 머리의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현관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아이들은 실컷 땡볕 아래 뛰어놀다 조이스 집으로 달려가 아이스크림을 얻어먹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도 조이스를 밖으로 데려 나오진 못했다. 남편 데이브가 출근을 하면 조이스는 큰집에 홀로 남아 집 뒤편 호수만 바라보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이스는 스스로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생을 마감했다.

늦은 밤 아니 새벽에 대여섯 대 정도의 차들이 요란한 불빛을 돌려가며 동네에 모여들었다. 조이스는 그렇게 떠났다. 조이스가 떠난 후 며칠 동안 데이브가 혼자 집 뒤편 호숫가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곤 했다.

 

얼마 후 이웃집 낸시와 미트로프를 구웠다. 이것저것 복잡한 음식을 해서 데이브를 가져다주는 거보다 미트로프는 그냥 먹어도 되고 샌드위치로 먹기도 좋으니 미트로프를 구워주는 게 낫다는 낸시의 의견에 따라 미트로프를 구워 데이브를 찾았다. 그는 지난주 토요일 그라 지지 세일에서 조이스의 물건들을 팔았다고 했다. 조이스의 물건을 정리해서 $1500 달러를 벌었다고 데이브가 슬프게 웃었다.

 

몇 개월 후 데이브는 조이스와 살았던 집을 팔고 이사를 갔다.

가기 전 데이브는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 거한 아이스크림 파티를 열어줬다. 떠나면서 나와 낸시에게 그때의 미트로프는 정말 맛있었다고 정말 많은 위로가 되었다며 고마워했다. 그렇게 데이브는 떠났다.

 

어릴 적 아파서 학교도 결석하고 누워 있으면 아버지는 늘 복숭아 통조림을 사 오셨다.

밥도 까끌까끌 거리며 먹기 싫을 때 그러면서도 배는 고프고 그럴 때 아버지가 사 오셔서 깡통을 따서 잘라 먹여주던 복숭아 통조림.... 달콤한 주스와 부드럽게 흘러 넘어가던 복숭아 통조림의 맛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버지는 늘 그렇게 나의 아픔을 위로해 주셨다. 달콤한 복숭아 통조림으로....

 

여고 때 시험이 끝나면 단짝 친구 둘과 늘 학교 앞 홍콩 반점에 갔다.

우리는 시험을 잘 보았던 못 보았던 아무 상관없이 시험을 무사히 끝낸 우리들에게 스스로 대견해하며 위로하듯 홍콩 반점에 가서 매운 짬뽕을 먹었다. 시험이 끝나는 날은 엄마는 당연한 듯 내게 짬뽕 값을 주시곤 했다. 그때 눈물 콧물 짜며 먹었던 그 매콤한 짬뽕은 아직도 입안에 침을 고이게 한다. 머리 아픈 시험을 치른 우리들 스스로의 위로...

 

오래전 결혼을 하고 한국을 떠나기 전 내가 먹었던 마지막 엄마 음식은 김밥이었다.

김밥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떠나기 전날 저녁에 여러 가지 속을 넣은 김밥을 싸면서 엄마는 울었다. 나는

"엄마 걱정하지 마셩~~ 잘하고 살 거야~~"라고 히히대며 김밥 꽁댕이를 먹었다. 요즘도 김밥을 쌀 때면 그때의 엄마가 생각난다. 나는 엄마처럼 훌쩍이지 않는다.

 

이혼하면서 정말 힘들 때....

잠도 못 자고 몸무게도 빠지고 입맛을 잃어 밥 한수 저도 넘기기 어려울 때 코코 아줌마는 나를 불러 시원한 물냉면을 만들어 주셨다. 이북 출신 코코 아줌마 친정엄마에게 배운 방식 그대로 시원하게 육수를 만들어 고명을 얹어 내밀었던 물냉면 한 그릇을 나는 국물까지 다 마셨다. 그때 그 냉면 한 그릇으로 나는 힘을 얻은듯하다. 코코 아줌마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나는 그 위로를 갚지 못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한국 방문을 했을 때 한국을 떠나기 전 아침에 먹은 엄마 밥은 청국장이었다.

묵은지를 썰어 넣고 두부를 숭덩숭덩 넣고 매운 고추를 몇 개 집어넣은 쿰쿰한 청국장에 밥을 비벼 먹고 나는 나머지 국물 한 방울까지 싹싹 비워내다 " 얘~ 비행기 타고 갈 때 냄새난다 그만 먹어~" 하며 엄마한테 등짝을 얻어맞았다. 하지만 그 청국장은 오랜 비행시간 내내 나를 위로하며 내게 새로운 에너지를 줬다.

 

살면서 많은 눈물과 한숨과 걱정과 고통 속을 헤맬 때 나를 위로해 줬던 한 그릇이 있다.

아버지의 복숭아 통조림이나 친구들과 먹었던 짬뽕이나 엄마의 눈물이 짭짭했던 김밥이나 코코 아줌마의 냉면 한 그릇..... 그리고 등짝 스매싱을 받아 가며 먹었던 쿰쿰한 청국장 한 그릇.... 그 외에도 내가 알게 모르게 나를 위로해 줬던 따뜻한 한 그릇... 내가 힘들 때 어려울 때 내게 온 한 그릇의 음식은 힘센 용사처럼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 기운 나게 했다.

 

위로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그 수많은 방식 중에 나는 음식을 통한 위로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 음식은 체내로 들어가 열량을 내어 내 몸에 힘을 발휘하게 한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위해 그 음식을 만들었다는 그 마음이 내게 온전히 전달되어 내 마음에도 큰 힘을 발휘한다.

 

나는 따뜻한 말주변은 별로 없는 사람이다.

나는 힘든 사람에게 척척 경제적인 지원을 할 수 있을 만큼 물질이 풍족한 사람도 아니다.

시간이 여유로워서 누군가를 위해 아낌없이 시간을 지원할 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지도 못하다.

하나,

가끔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음식을 나누며 살고는 싶다.

누군가 내 한 그릇을 먹고 힘을 내어 하루하루를 잘 살아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 구워진 미트로프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다.

곁들여 먹을 매쉬드 포테이토를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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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미트로프 구울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은 데이브가 아니라 조이스 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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