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내안에 수다.

2017 허리케인 "IRMA" 의 기록.

북아프리카 2023. 1. 27. 06:32

 

 

바람이 많이 불었다.

 

바람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 속이 울렁거리고 멀미가 났다.

12:30분경 전기가 끊겼다.

한밤중인데 웬일로 밖은 주차된 차들이 보일정로도 환했다.

비는 많이 내리지 않았는데 바람은 무서웠다.

바람소리가 심장을 벅벅 긁어대는 듯이 날카로웠다.

머언 카리브의 바다를 지나온 바람이 내륙에 상륙해서 마지막 용트림을 하듯이 맹렬했다 

빗소리는 바람소리에 비하면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바람소리가 잠시 멈추는 순간 들리는 빗소리는 차라리 위로가 됐다. 

무서운 밤이었다.

간혹 번개가 하얗게 정전된 도시를 밝혔다.

바람에 버티는 나무들의 사투가 힘에 겨워 보였다.

많이 흔들리지만 아직 쓰러진 나무들은 보이지 않았다 .후레쉬 라이트를 켜고 집안 창문들을 보고 또 보고 밤새 서성였다...

오래전 지났던 허리케인 챨리는 지붕의 슁글들을 날리고 수영장 펜스를 날렸었다.

그래도 그때는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두드리고 폭우를 퍼붓고 그렇게 순식간에 지났었다.

하지만 " 어마"는 크고 거대한 몸집을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어릴 적 티브에서 보았던 "전설의 고향" 귀신의 테마송 같은 바람소리가 소름 돋았다.

어디선가 드르륵 거리는 소리와 금속의 날카로운 비명 같은 소리도 들렸다. 

창문 틈을 통해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 머리까지 덮었다. 
아침이 되었다. 바람은 아직 세게 불었지만 맹렬하지는 않았다. 

비는 간혹 뿌리다 말다 뒤돌아 물러서는 듯했다.

밤새 잠들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폈다.

밤새 바람과 사투를 벌이던 나무들은 지쳐 보였다 무수한 이파리들을 여기저기 흩뿌려 쌓아 놓았다.

군데군데 뿌리를 들어낸 채 넘어져 버린 나무들이 보였다.

지붕에서 떨어져 나간 슁글들이 뒹굴었다. 지붕 끝자락에 매달려 물을 받아주던 홈통이 쭈그러진 채 떨어져 나갔다. 
멀리서 , 비로소 ,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아직 흐린 회색빛 구름 위로 언뜻 보이는 햇살 한줄기가 고마운 허리케인 " 어마 " 가 지나간 월요일 오전 9 시 20 분의 기록. 


덧붙여.....
월요일 새벽 12 시 30 분에 끊긴 전기는 월요일 낮과 밤 동안도 복구되지 않았다. 

비가 멈추고 바람이 멈추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열대지방이었다는 걸 실감했다. 

찌는듯한 더위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에어컨, 오븐, 냉장고, 폰충전, 인터넷, 라디오, 티브, 청소기, 형광등, 커피포트, 선풍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열대지방에 툭! 떨어져 버린 기분이었다.

다행히 물은 끊기지 않았다. 

어제는 비와 바람소리에 두려워서 잠을 못 이뤘는데.. 월요일은 더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화요일 아침에 폰을 충전하러 차에 시동을 걸고 도로로 나갔다가 식겁했다.

전기가 끊어진 도시. 도로 신호등이 다 꺼진 상태... 라디오에선 4 way stop을 하며 서행운전 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네 군데 교차로에서 먼저 선 사람이 먼저 가라는 말. 

왕복 6 차선에서 누가 먼저 스톱을 하는지 누가 먼저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은행도 주유소도 슈퍼마켓도 버거킹 맥도널드도 다 문 닫았다. 

떨어진 간판들이 흉측하게 뒹굴었다. 

라디오에선 전기가 끊긴 사람들이 5.6 밀리언정도 된다고 처음부터 다시 공사를 해야 되는 곳도 있단다.

일주일 혹은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니 참고 기다리라는 말이다.

쓰레기 봉지를 든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냉장고에서 녹아져서 먹지 못하고 버려지는 음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화요일 오후 6 시경 전기가 복구되었다. 

에어컨이 세 시간 넘게 쉬지 않고 돌면서 실내 공기를 식혔다.

청소기를 돌리고 냉장고에서 마지막 버릴 것들을 정리해 버렸다.

빨래를 돌리고 폰을 충전하고 무사한 안부를 가족과 친지들에게 전했다.

커피를 진하게 내렸다.

집안에 커피내음이 왠지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다.

샤워를 하고 실링팬이 돌아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Vangelis의 "Conquest of Paradise"를 들으며 나는 손톱을 깎았다.


짧아진 손톱을 바라보니 왠지 내가 겸손해진 것같이 느껴졌다.

'나에게. > 내안에 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 월의 여자.  (0) 2023.01.31
전지 ( 剪枝 )  (0) 2023.01.30
눈물로 세상을 버티려고 하지마라.  (3) 2023.01.25
두번째 내린 커피에 관한 짧은 생각.  (0) 2023.01.22
청국장.  (0) 2023.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