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내안에 수다.

순악질 여사.

북아프리카 2023. 2. 2. 10:51

 

 

아.

망했다.

오늘 나는 영락없는 순악질 여사다. 오늘 하루 종일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것인가.....

내 나이 스물다섯이 되고서야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집으로 찾아온 화장품 방문판매 아줌마에게 처음으로 화장을 당해 보고, 엄마는 똑같은 것들 일체를 사주시는 걸로 당신의 딸에게 화장을 가르치셨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청바지에 티셔츠 짧은 머리, 세수만 하고 베이비 로션만 바르고 날쌘돌이처럼 다니는 나를 엄마는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결혼 후 남의 나라에 와서 살면서 화장할 일이 거의 없었다. 예배당에 출석할 때는 일주일에 한 번은 차려 입고 화장을 했지만 다른 날들은 세수하고 로션이나 바르고, 어느 때는 세수도 안 하고 눈곱만 떼고, 어느 때는 로션도 생략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 선글라스만 덮어쓰고 용감하게 그냥 댕겼었다.

혼자가 된 후 전화 통화를 하면서 엄마가 내게 강조하며 하셨던 말은 " 이쁘게 하고 다녀~~ 꼭 화장하고 다녀~~ "였다. 가뜩이나 혼자 사는데 화장도 안 하고 대충 챙겨 입고 다니면 혹시나 다른 이에게 업수이 여김을 당할까? 혹은 기가 죽을까? 언놈이 쉽게 볼까? 하는 마음으로, 어깨 힘주고 다니라는 엄마 나름의 생각이셨던 듯하다.

 

화장을 하면서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눈썹 그리기다. 오래전 엄마가 다니러 오셨을 때 엄마랑 예배당 가려고 같이 앉아서 화장을 하다가 엄마가 내 얼굴을 보시고 침대에 엎드려 기절할 듯이 웃으셨다.

"얘~ 너 꼭 순 악질 여사 같다 ~~~~~ 어쩜 ~~ 세상에 눈썹이 그게 모니? ㅎㅎㅎㅎㅎㅎ"

엄마는 내가 그린 순 악질 여사 눈썹을 지우고 내가 가지고 있는 내 눈썹에 살짝 덧칠만 해주시는 걸로 내 눈썹을 다시 그려 주셨다. 그 후로 나는 가끔 나로 불리기도 했다가 또 가끔은 순 악질 여사로 불리게 되었다.

 

어린 시절 코미디나 개그 프로를 잘 안 좋아했던 내가 그래도 종종 놓치지 않고 봤던 개그 프로가 " 쓰리랑 부부 "였다. 개그우먼 김미화와 김한국이 부부로 나왔던.... 나와 비슷한 세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많이 기억할 것이다. 검은 일자 눈썹에 야구 방망이를 들고 언제나 남편에게 큰소리치며 남편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순 악질 여사. 오늘 나는 영락없이 순악질 여사다.

 

혼자가 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을 흘려보낸 후 내가 깨달은 건 세상은 내게 그리 관대하지 않구나 하는 거였다. 아홉 번을 잘한 사람이 한 번을 잘못했을 때 다수의 사람들은 "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결국 너도 그런 사람이었어..." 하는 비난이나 비웃음이었다. 아홉 번을 못한 사람이 한 번을 잘했을 때 다수의 사람들은 " 아.... 그 사람 안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괜찮은 사람이었어..." 하는 관대함이나 포용이었다. 이 웃지 못할 몇 번의 해프닝을 겪고 난 후 나는 아홉 번 잘한 사람보다 한번 잘하는 게 살기는 편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엄마 말대로 화장을 하고 다니게 되면서 나는 종종 나를 순악질 여사로 만들곤 했다.

누군가를 만나서 내 의견을 관철시켜야 할 때, 누군가를 만나 확실한 거부의 의사를 표현해야 할 때, 누군가에게 나를 유하지 않게 보이려 할 때 ,,,, 나는 한껏 내 화장에 힘을 주고 특히나 눈썹에 한껏 힘을 주곤 했다. 눈썹을 진하게 두껍게 그리고 작지 않은 눈에 아이라인에 마스카라까지 해서 돋보이게 만들고 만나서 대화할 때 상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기.... 나는 절대로 너한테 주눅 들지 않아... 나는 절대로 너 따위한테 겁내지 않아...라는 나만의 한 수 꺾고 들어가는, 화장을 통한 강한 인상 표하기.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그렇게 본의 아니게 순악질 여사 비슷한 눈썹을 그리며 살았다.

어디를 가든지 지지 않겠다. 무너지지 않겠다. 기죽지 않겠다 하는 각오로...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흐르면서, 불끈 쥐었던 주먹도 이제는 어느새 스르르 풀리고 바짝 날 섰던 손톱도 뭉툭해지고 바위라도 뚫을 듯 힘줬던 눈에 힘도 빠졌다. 아홉 번까지 잘하는 사람이 되지는 못해도 아홉 번 못되게 구는 사람은 안되려고 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렇게 강한 화장을 하지 않는다. 엄마 배꼽을 쥐게 만들었던 일자 눈썹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순악질 여사가 아니다. 나는 그냥 순둥이 여사다. 모....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한다... 믿거나 말거나.

 

지난 주말, 적지 않은 숱을 가진 눈썹이 너무 삐죽삐죽하길래 정리한다고 거울보고 조몰락거리다가 그만 너무 잘라버렸다. 딸아이를 불러 티가 나나 물어보니,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깔깔대며 웃었다.

" 엄마.... 외계인 같아요..... ㅋㅋㅋ " 아.... 너무 밀었다. 출근하면서 밀어버린 곳을 살살 그리고 출근을 했다.

오늘 아침, 처벌 처벌 화장을 하고 눈썹을 그리는데 ,,,, 아..... 왜 자꾸 두껍게 그려질까....? 아마도 밀어버린 곳을 티 나지 않게 만회하다 보니 자꾸 두껍게 그려져 버리는 거 같다. 면봉으로 다시 지우고 다시 살살 살짝 그려 봤다. 너무 약한 듯해서 다시 한번씩 덧칠을...... 아..... 또 너무 두껍고 길고.... 출근시간에 쫓게 그냥 출근을 했다. 운전을 하며 거울을 보니 영락없는 순 악질 여사다. 앞머리로 최대한 눈썹을 가리고 하루를 보냈다... 퇴근해서 화장을 지우고 거울을 보니, 순하디 순한, 착하디착한... 이쁜 아줌마가 서있다. 나는 절대 순 악질 여사가 아니다. 나는 그냥 순둥이 여사다......

 

아...

내일은 또 어떻게 눈썹을 그려야 하나 일찍 일어나야 하겠지? 망칠 것을 대비해서?

친구 말대로 문신을 해야 하나? 순둥이 여사에서 당분간 순악질 여사로 변신을 해야만 하는 순하디 순한 순둥이 여사,..

09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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