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내안에 수다.

열무김치 .... 사무치다.

북아프리카 2023. 2. 4. 10:53

 

 

지난주 주말에는 차로 40 분이나 걸리는 한국식품에 다녀왔다.

얼마 전 즐겨 보던 유튜브에서 열무김치가 나왔는데 며칠 동안 머리에서 열무김치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한 달 전에 왔을 때는 4 파운드 ( 1.81 Kg ) 한 병에 $21.99 정도였는데 이번에 가보니 $29.99이었다.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 으로 몸살을 앓듯이 이곳도 인플레이션으로 하루가 다르게 물라가 치솟고 있다.

나 혼자 먹을건데 겨우 조그만 한 병에 30 달러나 하다니..... 흠....

 

야채 코너를 가보니 열무 몇 다발 묶음이 제법 싱싱하길래 4 묶음을 샀다.

실은 부끄러운 이야기 지만 열무김치를 해본 적이 없는 거 같다. 배추김치는 그런대로 흉내를 내듯이 잘 담아내는데 그 외

총각김치나 열무김치나 부추김치나 파김치나.... 모... 좀 특별한 김치들은 별로 자신이 없다.

그래도 엄마한테도 물어보고 인터넷도 뒤져서 찹쌀풀도 쑤고 붉은 고추도 갈고 열무도 살짝 절이고 헬라 피뇨 고추도 썰어놓고 제법 향기가 그럴듯한 열무김치를 담았다. 밖에 이틀 정도 놔두었더니 찹쌀풀이 발효가 잘 되었는지 냄새도 맛도 그럴싸한 시원한 열무김치가 되었다.

 

 

< 사무치다 >

 

사무치다.

  1. 쉬이 떨칠 수 없을 만큼 깊이 강렬하게 느껴지다.
  2. 깊은 곳까지 이르러 미치다.

김훈 님의 " 내 젊은 날의 숲"을 다시 읽고 있다.

화자는 비무장지대 수목원의 세필화가다. 어느 날 국방부 유해발굴단에서 자등령에서 수습된 유골들의 스케치를 부탁한다. 유골과 함께 발견된 유류품 중에 어느 병사의 편지가 있었다.

 

" 어머니, 우리는 지금 중대라고 하지만 오십 명뿐입니다. 적의 대부대는 다시 이 고지를 빼앗으러 올 것입니다. 우리도 빼앗았으니까 적들도 빼앗겠지요. 우리는 지금 참호 속에서 거총하고 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적들은 기척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는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풀 먹인 여름옷을 입고 싶어요"

 

한국말로 쓰인 책이 귀한 이곳에서 나는 가지고 있는 몇 권의 책들을 아껴며 보고 또 본다.

처음 읽을 때는 내용을 주로 파악하면서 두 번째는 작가의 관점에서 작가의 의도를 알고자 세 번째가 넘어가면 문장 문장을 뜨거운 커피 마시듯 천천히 음미하며 쉬어가며 소화시키듯이 읽는다. 첫 번째 두 번째에서 눈에 담겨지지 않았던 책 속에서의 어느 병사의 편지가 마음에 담겼다. 죽음을 앞에 둔 젊디 젊은 아니 어린 병사가 그리워했던 어머니의 상추쌈 밥상. 그 어린 병사는 상추쌈이, 어머니가 얼마나 사무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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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은 가볍다.

금요일은 반나절 근무만 한다.

도로는 오후 2 시인데도 벌써 차들로 넘실댄다.

빨간불 앞에서 시그널이 바뀌길 기다리며 열무김치 생각만 했다.

고추장에 참기름 넣고 비벼 먹을까? 소면을 삶아서 열무 비빔국수를 해 먹을까? 아니 그냥 밥을 물에 말아서 김치하 고만 깔끔하게 먹는 것도 괜찮겠지?

 

집에 도착해서 내가 준비한 것은 열무김치 냉면.

지난번 한국식품점에서 사 온 평안도식 동치미 물냉면을 뜯어 면을 데쳐 준비하고 차가운 육수를 붓고 그 위에 잘 익은 열무김치를 얹고 삶은 달걀을 올렸다. 아..... 진짜 얼마 만에 먹어보는 열무김치 냉면 이라니....

그야말로 사무치게 열무김치 냉면을 먹었다. 눈이 저절로 감기는 맛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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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고 힘들 때 나를 다시 세우는 대부분의 위로는,

실은 다른 이의 상처나 고통 위에서 빛을 발한다.

 

"그래도 네가 나아.... 그러길 천만다행이지 모야.... 이만큼 했으니 괜찮아....... 살아 있으니 된 거야...."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이의 상처나 고통에 나를 비추어 보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남들을 위로한다. 내가 힘들 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보며 위로받고 힘을 내고 어느 때는 나의 힘듬을 보고 나보다 덜 힘든 사람이 위로를 받는다.

 

나는 오늘,

오래전 죽음을 앞에 두고 상추쌈을 그리워했던 어린 병사의 편지를 읽고 열무김치 냉면을 먹으며 사무치게 위로를 받는다. 오래전 죽음을 앞에 둔 어린 병사가 그리워했던 어머니 밥상의 상추쌈과 잘 다려진 모시옷....

나는 비록 어머니의 밥상은 아니지만 어설픈 내 열무김치 냉면 한 사발로 위로를 받는다.

나는 적군을 앞에 둔, 죽음을 앞에둔 병사가 아니어서 나는 언제든 상추쌈을 먹을 수 있어서 나는 모시보다 더 시원한 여름옷이 있고 나는 비록 멀리 있지만 엄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그리고 나는 아직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지금,

그대가 별 수고와 노력 없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내가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애태우는 게 있다면..........?

그대로 나로 인해 위로받을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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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젊은 날 숲에서 잠든 어린 병사여

부디,

평안하라.

 

 

06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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