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내안에 수다.

고모가 돌아가셨다.

북아프리카 2023. 8. 13. 10:30

고모가 돌아가셨다.

주말,

일을 마칠 때 즈음 한국에 계신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 얘.... 고모가 가셨다. 오늘 아침에 ...."

며칠 전 엄마가 고모와 통화를 했는데 고모가 숨이 너무 가빠서 말하기도 힘들다고 하신다고 나보고 시간이 되면 고모한테 전화 넣어 드리라고 하셨다. 여동생에게 전화번호를 보내라고 해놓고 동생도 나도 차일피일 미루다 ... 그 새 고모가 황망히 세상을 버리셨다. 초등학교 다닐 때 나는 학구열이 대단한 엄마의 성화로 고모 집에서 5 학년 1 학기 동안 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다. 그래서 고모에 대한 나의 감정은 좀 남달랐던 거 같다.

고모는 5 남매 중에 큰 오빠였던 울 아버지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중학교 2 학년 때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신 그리운 내 할머니의 하나뿐인 딸....

큰 오빠인 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둘째 오빠인 작은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그리고 고모가 가운데 고명딸이었다.

고모 밑에 남동생인 셋째 작은아버지도 일찌감치 간경화로 세상을 버리고 연락이 안 되는 미국에 살고 있는 막내 작은아버지만 아버지 형제 중 유일하게 남았다.

초등학교 때 우리 가족은 지금은 대도시가 된 서울의 위성도시에 살고 있었다.

초등학교 4 학년을 마치고 교육열에 불탔던 나의 엄마는 나를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나를 서울에 살고 있는 고모 집으로 유학을 시켰다. 고모네는 여의도가 바로 보이는 마포의 언덕배기 남의 집에 방 두 칸을 빌어 살고 있었다. 고모부는 다른 데서 일을 하셔서 고모랑 고모부는 주말부부로 지내셨다.

고모는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딸 둘은 내겐 언니였고 아들은 내게 동생이었다.

엄마는 천상 서울여자 스타일이었다.

깍쟁이였고 새침하셨으며 깔끔하고 까다롭고 생전 험한 말도 우리에게 안 하셨다.

그런데 고모는 달랐다. 고모는 거칠고 대충 서럽고 "년"이나 " 계집애"쯤은 애칭으로 여길 정도루 심한 말도 서슴없이 하셨다. 어린 나는 그런 것들이 너무 무섭고 싫었다. 날마다 밤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삼켰다.

엄마를 닮아 정리 정돈 깔끔함이 배였던 나는 늘 정리 안된 그 집 분위기며 주위 상황이 너무 싫었다.

언니들은 언니라서 남동생은 동생이라서 자잘한 심부름은 늘 내 차지가 되었다. 아침에 자고 있으면 고모는 늘 나를 깨워 아랫동네 가게까지 가서 두 부며 콩나물 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부스스 일어나 심부름을 하며 내가 구박받는 콩쥐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 심부름들 중에서 내가 가장 하기 싫었던 심부름이 있었다.

주말 이면 고모부가 집에 오셨다.

방이 둘뿐이라 언니들과 내가 한방에서 자고 고모와 고모부 남동생이 같이 잤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고모는 나를 깨웠다. 그리고 지폐를 쥐여주며 말했다.

" 콘돔 주세요 "

나는 지폐를 쥐고 골목을 내려가며 내가 콩쥐라는 생각보다 젊고 잘생겼던 약국 아저씨에게 어떻게 이 말을 하나 고민했다. 초등 5 학년이었던 나는 성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막연히 콘돔이 남녀 사이에 어떤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거 같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처럼 태연한 얼굴로 말하기를 연습했다.

이른 아침 드르륵 약 국문을 열고 작은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약사에게 말했다.

"콘돔 주세요 "

그걸 받아 골목을 냅다 뛰어올랐다. 왠지 그냥 부끄럽고 싫고 화나고 슬프고 약이 올랐다.

엄마라면 절대로 내게 이런 심부름을 시키지는 않았을 텐데 ... 절대로 .... 나한테 ... 이렇게 이른 아침에 ... 이런 심부름을.... 나는 고모가 너무너무 미웠다.

5 학년 1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 때 집으로 돌아간 나는 방학이 끝난 후 고모네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대성통곡을 하며 안 가겠다고 엄마 아빠에게 소리쳤다. 다시 고모 집에 가서 이른 새벽에 일어나 심부름을 하고 방 청소를 하고 또 주말마다 콘돔 심부름을 할 생각을 하니 나는 죽자 사자 울며 안 가겠다고 벼텼다. 물론 콘돔 심부름 이야기는 안 했다. 외할머니가 나를 품어 안으시며 엄마와 아빠에게 절대 보내지 말라고 학교고 나발이고 자식은 부모가 키워야지 하고 호통을 치셨다. 나의 서울 유학은 그렇게 반년 만에 끝이 났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고모를 보지 않았다. 고모도 내게 늘 별로 친절하지 않았던 두 언니들도 그리고 늘 나를 만만하게 대하던 사촌 남동생도 다 꼴 보기 싫었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에 고모네 집에 인사를 갔다.

할머니 손맛을 그대로 갖고 있는 고모는 이것저것 반찬을 만들어 나를 대접해 주었다.

나는 그제야 천연덕스럽게 고모에게 물었다.

" 고모... 왜 그때 그 이른 아침에 나한테만 늘 심부름을 시켰어요? "

고모는 전혀 기억에 없는 듯이 깔깔대며 웃었다.

" 내가? 그랬어? 계집애 .... 어린 게 별걸 다 꽁하고 있었구나 ... "

그게 고모를 본 마지막이었다.

결혼해 남의 나라로 건너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주 가끔 엄마를 통해 고모부의 부고를 듣고 사촌 언니와 동생의 결혼 소식을 듣고 또 고모의 건강에 대한 소식도 전해 들었다. 할머니를 닮았는지 고모는 나이 들수록 심장이 약해졌었다. 예전에 화통처럼 크게 울리던 목소리도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고 엄마는 안쓰러워했다. 오래전 한국에 갔을 때도 나는 고모를 만나지 못했다. 겨우 전화를 걸어 귀국 인사를 전했다. 고모는 쉐~에 색 쉰 소리를 내며 밥 한 끼 멕이지 못함을 미안해했다.

출국 인사로 전화를 했을 때 다음에 오면 고모가 담근 갓김치를 꼭 멕여달라고 하며 나는 다시 비행기를 탔었다.

그게 끝이었다.

피를 나누고 혈연으로 이어진 " 혈육 "이나 " 가족 "으로 묶여진 사람들이 한 세상을 살면서 과연 얼마나 자주 만나고 살아가나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멀리 남의 나라에 살고 있으니 더 힘들지만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얼마나 자주 서로를 만나고 살아가나 하는 생각이 든다.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매일 만나는 직장의 동료나 자주 내 집에 물건을 배달하는 사람이나 자주 가는 상점의 캐시어만큼도 서로 얼굴을 대하지 못하는 혈육이나 가족이 더 많다.

나는 근 삼십 년 동안 고모를 만나지 못했다. 고모의 늙어감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피를 이어받고 내려받은게 무엇인지 나는 삼십년이나 보지 못했던 고모의 죽음에 가슴이 먹먹하다.

한번쯤 다시 만날수 있었을텐데....한번쯤 가시기 전에 목소리 정도는 들을수 있었을텐데....

고모.

아버지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을 떠난 고모는 지금 어디로 돌아가고 있을까?

고모가 돌아간 세상에 내 아버지는 계실까? 할머니는 만났을까?

어린 시절,

차마 말하지 못했던 내 마음 한구석에 고모에 대한 원망 혹은 미움도 이젠 갈 곳을 잃었다.

그저 사과를 깍으며 어린 조카의 지난 투정에 웃어주던 할머니를 꼭 닮았던 그 웃음만 머리속에 가득하다..

고모가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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